그리고 앞으로 이 모든 게 어떻게 될 것인가?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는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1955)이 25세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입니다. 열린책들 35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단행본 시리즈로 읽었는데 크기도 작고 비교적 적은 분량이라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가볍게 읽으려고 가방에 넣어갔다가, 난해하고 장황한 문체에 지하철에서 선 채로는 쉽게 읽을 수 없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19~20세기 근현대 독일을 살아간 지식인의 자전적 소설이라니 이해가 될 법도 합니다. 당시 독일의 지성사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도 토마스 만은 번민과 고통에 사로잡혀 바들거리는 깨질듯한 투명한 유리 같은 지식인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책은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한 소년 토니오가 단순하고 유쾌한, 비예술인으로 대면되는 동급생 한스 한젠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습니다. 토니오는 한스 한젠이 상징하는 보편적인 모범 시민의 삶을 향한 동경을 자기 만의 방식으로 정의해내고, 끝내 모든 세계를 끌어안은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혼자만의 외로운 사유의 여정을 따라가며 예술가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책의 줄거리
예민하고 영특하며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한 토니오는 밝은 금발에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단순하고 활기찬 모범 소년 한스 한젠을 동경합니다. 반면 자신은 어머니를 닮은 이국적 외모에 늘 번민에 휩싸여 있고 기질이 예민한 탓에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매사 단순하지 않습니다. 토니오는 한젠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자신의 쉽지 않은 기질을 한탄하는 듯 하지만 이는 자기 혐오나 비관이 아닌 스스로를 향한 질문과도 같은 성찰의 과정입니다. 그가 끝내 동경하던 이들과의 감정적인 교류에 실패하고 고향을 떠나 자신만의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 것은 한쪽의 세계를 선택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정해진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유한 지성의 활동으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은 결코 한 세계에서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완전한 위대함과 야만적인 아름다움의 환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정상적이며 예의 바르며 사랑스러운 것이 우리가 동경하는 영역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63쪽, 창립 35주년 기념판)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은 후 화가 리자베타와 예술가로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토니오는 새로운 결정을 해야 할 때임을 직감하고 어릴 적 살던 도시로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의 말미에 토니오는 어릴 적 그토록 동경했던 한스 한젠을 만나지만, 그는 토니오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가 등을 돌린 하나의 세계, 손에 잡히지 않는 인간의 형상들이 우글거리는 세계가 여전히 단순하고도 유쾌하게 웃으며 눈앞에 있지만, 그 세계는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질서와 형상의 세계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해버렸고 그 인간의 세계는 처음부터 그랬듯이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아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난 두 눈을 가만히 감습니다. 그러자 아직 생겨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 합니다. 또 인간의 형상을 한 허깨비들이 우글거리는 세계도 보입니다. 이들은 마법을 걸어 자신들을 풀어 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126쪽, 창립 35주년 기념판)
토니오는 리자베타에게 약속한 편지를 씁니다. 평범한 삶이 주는 환희, 그것을 향한 동경을 가슴에 품은 새로운 예술가의 세계를 감지했음을 고백합니다. 청교도적 아버지의 세계와 남쪽 나라의 열정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세계, 그의 기질이 선택한 세계와 그가 동경했던 세계, 질서와 형상의 틀에 맞춘 이성으로 정념과 생기가 가득 찬 환희를 충만하게 받아들이겠노라 리자베타에게, 어쩌면 스스로를 향해 기어코 선언합니다.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토니오 크뢰거>는 단순하게 해석하기에는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당대의 독일의 지성사에 대한 사전 이해가 도움이 될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필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태양 아래 밝게 드러나 따듯하게 반짝이는 보편의 세계와 축축하고 어두운 것을 손을 적셔가며 뒤적이지 않으면 감각할 수 없는 특수의 세계. 그러나 보편과 특수를 그와 같이 정의하는 것도 하나의 특수한 관점일 뿐입니다. 토니오의 번민에 쉽게 공감할 수 없는 것도, 묘한 지적 우월의 정취가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일 듯합니다. 토니오가 동경했던 한스 한젠은 토니오가 가질 수 없었던 모범 시민을 대변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현재의 고고한 지적 성취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예술가적 감각을 위해 스스로 포기한 또 하나의 자아일 수 있습니다. 그 포기 또한 자의에 의한 것으로 서술하는 작가의 우월한 태도 또한 흥미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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