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생텍쥐페리가 밤하늘에 띄운 숭고한 찬가
<야간비행 Vol de nuit>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 de Saint-Exupery, Antoine가 1931년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는 대표작 <어린 왕자>를 쓰기 10여 년 전, 아르헨티나 비행 항로 개척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항공사가 야간비행을 시작했던 초창기, 종사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실감 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 31일, 혼자 정찰 비행을 나갔다가 자신의 비행기 '록히드 P-38라이트닝'과 함께 실종되었고, 당시는 전쟁 중이라 수색이 불가능해 격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1998년에 마르세유 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생텍쥐페리의 신분 인식 팔찌가 걸려 올라왔고, 2003년에 그의 비행기로 추정되는 잔해를 인양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다간 탓에, 그의 자전적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열두 살에 처음 비행기를 타본 후(아마도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왔다고 조종사에게 거짓말을 한 듯합니다.) 쓴 시가 남아있어 그의 아름다운 문장력과, 앞으로 그의 인생을 아름답게 물들일 조종사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날개들은 저녁 미풍에 떨고 있었다.
엔진의 노랫소리가 잠든 영혼을 달랬다.
태양은 창백한 빛으로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책의 줄거리
이 책의 배경은 1920년대 항공사가 야간비행으로 우편물을 운반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남아메리카 항공기지입니다. 지상에서 모든 항공 노선을 총괄하는 책임자 리비에르는 가혹해 보일만큼 모든 일에 엄격하고 투철합니다. 폭풍우 치는 밤, 야간 비행 중인 조종사와는 교신이 두절되었고, 밤새 폭풍우에 쫓기는 조종사의 동료들과 가족들은 숨 막힐 듯한 기다림 속에서 밤을 새웁니다. 그 무거운 부담감을 밤새 온몸으로 버텨낸 리비에르는 오히려 동료들에게 깊은 우정을 느낍니다.
'투쟁의 동지로군. 이런 철야근무가 우리를 얼마나 결속시키는지 이 사람은 아마 절대 모르겠지.'
(야간비행, 생텍쥐페리, 문학동네, 2018년, 55쪽)
칠흑 같은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 뇌우에 쫓기는 조종사 파비앵은 어둠과 폭풍우에 포위되어 돌아올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별들을 향해 올라갑니다. 보석처럼 빼곡히 들어찬 별들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별들을 깨문 채 떠나버린 파비앵은 결혼한 지 6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실종을 알아챈 지상의 리비에르는 생각합니다.
산 자의 업무가 지연되고 있었다. '죽음, 이런 게 바로 죽음이다!'
...
단 한 번이라도 출발을 중단시켰다면, 야간비행의 명분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이면 그를 비난할 마음 약한 사람들을 앞질러 리비에르는 그날 밤에도 또 다른 승무원을 출발시켰다.
(같은 책, 120쪽)
당신의 밤하늘은 어떤가요?
생텍쥐페리는 실제 항공사에서 근무했을 당시 상사였던 '디디에 도라'를 주인공 리비에르의 모델로 삼았고, <야간비행>을 그에게 헌정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생텍쥐페리가 디디에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하니 그의 엄혹하고 몰인정함을 고발하기 위해 쓴 책은 아닌 듯합니다.
모든 것이 폭풍우에 흔들리고, 온몸이 부서질 듯 두려움에 떨릴 때에도 굳건하게 중심을 지키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또한 다른 방식의 희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온 숭고함은 여러 방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소중한 가치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가치들을 지켜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놀랍도록 발전해 왔습니다. 100년 전의 고전을 읽으며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내 손에 쥔 가치의 잣대를 마음껏 휘둘러보는 것도 독서의 자유로움이자 즐거움입니다.
눈이 멀도록 아름다운 별들 속으로 떠난 파비앵의 마지막 모습은 지상에서 슬퍼할 수많은 아내들과 동료들을 위한 생텍쥐페리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희생이 숭고하다는 찬가를 쉽게 부르기는 힘든 시기입니다. 비록 나의 밤하늘이 고요하지 않더라도 야간비행을 떠나는 이들이 모두 무사히 착륙하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다른 책
어린 왕자/황현산 번역/열린책들
여러 판본이 있지만 황현산 선생님의 번역이 아무래도 제일 좋습니다.
인간의 대지/김윤진 번역/시공사
야간 비행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Book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아>, 나는 관습보다는 감정을 묘사하고자 했다. (1) | 2024.04.09 |
---|---|
<토니오 크뢰거>,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1) | 2024.02.28 |
<쇼코의 미소>, 나를 조금 돌려 놓아줄래? (0) | 2024.01.01 |
<채링크로스84번지>, 거기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0) | 2023.11.26 |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0) | 202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