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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마리아>, 나는 관습보다는 감정을 묘사하고자 했다.

by 감밀손 2024. 4. 9.

John everett millais, Ofelia, 1851~1852.

 

여성의 고난

 

<마리아>는 영국의 여성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가 쓴 여성주의 소설입니다. 메리는 1792년의 <여성의 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로 이름을 알리며 급진적인 사상가로 활동했습니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와 같은 개혁적인 사상가들이 '인권'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은 교육이 필요하지 않으며 "남성에게 더욱 종속되며, 남성의 곁에서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집필되었습니다. 이후 여성의 권리에 관한 자신의 주장이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픽션'을 택합니다. '여성의 오류' 또는 '여성의 고난'으로 번역되는 <마리아 Maria or The Wrong of Woman>를 메리는 끝내 완결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그녀의 지적 동반자이자 남편인 고드윈이 평소 메리와 나누던 대화들, 메리가 남긴 메모들을 복기하고 다듬어 그녀가 사망한 후 출간하게 됩니다.    

 

책의 줄거리

어느 날 마리아가 정신을 차린 곳은 끔찍한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 찬 어느 정신병원입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이곳은 어디인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기약 없이 산 채로 묻힌 채 마리아는 관리인 제미마와 차츰 관계를 맺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영혼을 가다듬어 갑니다. 고귀한 가문의 숙녀임에도 아버지에게 속해 있던 미혼의 시기와 남편에게 속한 기혼의 시기에 각각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할 고난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전혀 미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주인이 된 불한당 같은 남편의 모략에 당해 아이를 뺏기고 정신병원에 감금됩니다. 그 고난의 여정은 생사를 알 수 없는 딸에게 쓰는 절절한 편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자들이 높은 지위를 얻을 유일한 길이

남자들의 방탕을 조장하는 것밖에 없으니

사회는 여자들을 괴물로 만들고,

그들의 비열한 악덕을 지력이 열등하다는 증거로 내세운단다."

(메리/마리아/마틸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 이나경 옮김, 한국문화사, 219쪽)

 

 

마리아와 관리인 제미마, 그들의 대화 속에서 연이어 펼쳐지는 또 다른 여성들의 비참한 고난의 행렬. 그들은 경제적, 신체적 안전을 위해 남자에게 속해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남성으로부터 경제적,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위협과 폭력을 당합니다. 그에 비해 남성인 단포드의 삶은 얼마나 단순하고 자유로운지... 물론 그 또한 마리아와 비슷한 이유로 감금되었지만, 감금되기 전 그가 살아온 행적과 그가 감금생활을 끝내게 되는 과정은 당시 여성들이 견뎌야 했던 고난에 비해 헛웃음이 날 정도로 간단합니다.

 

 

이런 종류의 결합은 그보다 월등한 원칙에 지배받는 사람들을 구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당연한 결과를 견딜 정신력만 충분히 있다면,
자신이 만든 적 없는 법의 지시를 초월해서 행동할 특권을 지녔다.

(같은 책, 284쪽)

 

 

남편과의 재판에서 판사를 향해, 그리고 어쩌면  딸을 향해 차분하게 이어지는 마리아의 변론, 그리고 '전체의 이익을 위한' 판사의 결정은 당시의 시대상을 가장 날카롭게 반영합니다. 저자는 '합리적인 이성'과 신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양심의 힘'이 여성들이 동의한 적 없는, 여성이 배재된 잔인한 법을 초월해 행동할 특권이며, 그 특권을 여성이 가지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메리/마리아/마틸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 이나경 옮김, 한국문화사

 

"갈등은 끝났어요!"

 

이 책이 쓰인 시기를 생각하면 '여성주의 소설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급진적이지만, 지금의 시선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 상이 반영된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 시대의 제약을 감안해야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가장 안타까운 점은 작가가 결론을 정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인 고드윈이 메리의 메모를 단서로 나름의 결말을 제시하긴 했으나 남성의 시선에서 본 여성의 '해피엔딩'은 솔직히 흔쾌이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책을 읽으실 분이 있다면, 읽기 전에 저자의 생애를 먼저 검색해서 훑어보길 권합니다. 특히 <마리아>와 함께 수록된 <메리>의 스토리가 저자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치며, 고드윈과의 파격적인 결혼생활이나 저자가 바라던 여성 공동체에 관한 아이디어도 책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대가 여성에게 씌운 굴레를 짊어진 채 치열하게 한발 한발 나아갔던 그녀의 인생에서 이 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Mary Shelley(2017년)

엘르 패닝(메리 셸리 역)

최초의 여성 SF 작가인 메리 셸리가 바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