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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채링크로스84번지>, 거기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by 감밀손 2023. 11. 26.

책을 찾아봐주시겠습니까?

<채링크로스 84번지 84, Charing cross road>는 미국의 작가 헬렌 한프 Helene Hanff가 영국의 중고책 서점인 '마크스 서점'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엮은 책입니다. 그들의 편지는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을 이어졌습니다. 헬렌 한프가 쓴 다른 글들은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마크스 책방이 주고받은 사적인 편지들은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오래 사로잡았습니다. 

 

오래된 중고책 서점으로 필요한 책의 목록을 편지에 써서 발송하는 미국의 가난한 작가와 청구서를 동봉해 답신하는 서점 직원 프랭크,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매우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즘은 작은 서점들도 고유의 인스타그램이나 이메일 정도는 대부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에 궁금한 점이 있다면 DM이나 이메일로 바로바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 있는 서점이라고 해도 온라인에서는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손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DM이나 이메일을 보내고 나면 상대방이 수신을 했는지까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지를 받은 쪽에서는 가능한 24시간 이내 답신을 하는 것이 에티켓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누구든 CS(Customer Service)의 개념이 익숙하기 때문에 조금만 응대가 잘못되었다거나 선을 넘어 버리면 주고 받은 메시지의 캡처 사진이 온갖 커뮤니티를 떠돌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헬렌과 프랭크처럼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기다리며 쌓이는 비밀스러운 우정과 돈독함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의 줄거리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무명 작가 헬렌은 우연히 저렴한 가격으로 중고책을 판매하는 '마크스 서점'의 광고를 보게 됩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라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을 구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찾는 책들은 취향이 확고하고 독특하기도 합니다. 프랭크가 성심껏 찾아서 보낸 책들을 받은 헬렌은 프랭크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하고, 이따위 책을 보냈냐며 타박하기도 하고 답신이 늦어질 때에는 '설마 나를 잊었냐'며 독촉하기도 합니다. 

 

나무늘보씨:

당신이 뭐든 읽을 것을 보내주기 전에 여기서 썩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궁리, 73쪽)

 

헬렌이 찾는 책들은 주로 일기나 서간문, 여행기나 수필 같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같은 책, 74쪽) 말합니다. 저는 오히려 정반대의 취향을 갖고 있어 일기나 서간문을 읽는 일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이 누락되거나, 기승전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글들은 재미가 없게 마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작가의 상상력이 펼치는 지어낸 이야기가 너무나도 흥미로워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굳이 시간을 들여 읽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여러분께 인사 보냅니다. 언젠가, 사정이 허락한다면, 제가 직접 건너가 내 나라가 지은 죄를 저 개인적으로라도 사과하겠습니다(그리고 귀국할 때면 내 개인적인 사과에 대하여 이 나라가 저한테 사죄를 해야 할 겁니다). (같은 책, 51쪽)

 

헬렌은 전쟁으로 인한 영국의 식량 사정을 알게 되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며 마크스 서점으로 계란이나 햄, 양말 같은 선물들을 보냅니다. 서점의 직원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의 답례로 감사를 표합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 세상에 일어났던 일'에 관한 책을 집요하게 요청하고, 또 그에 응답하는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심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오래도록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 따듯하게 마음을 두드리는 책입니다.

 

 

거기,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책을 끝까지 읽으며 어쩐지 제법 오래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은 언제나 해피엔딩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다정하면서도 과묵한 나무늘보 프랭크는 허망하게 죽음을 맞고, 헬렌은 끝내 마크스 서점을 방문할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증발해버린 한 친구를 떠올립니다.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 흔히 오랜만에 안부를 물을 때 "살아있어?"하고 묻지만, 요즘은 그런 인사를 함부로 건네기가 두렵습니다. 핸드폰을 들고도 그 한마디를 묻지 못해 오래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헬렌이 비행기를 타고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서점은 이미 문을 닫고 푯말만 남아있었습니다. 끝내 그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편지가 수십 년간 읽히며 그들의 안부를 묻게 합니다. 사라진 내 친구도 언젠가 헬렌처럼 나를 찾아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나의 서점은 그때까지 언제나 열려있을 테니까요.

 

혹시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같은 책, 145쪽)

 

이 책이 등장하는 영화

84번가의 연인(1987년)

앤 밴크로프트(엘렌 역), 안소니 홉킨스(프랭크 역)

 

 

북 오브 러브 Book of love (2016년)

탕웨이(지아오 역), 오수파(다니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