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하고 찬란한 평범한 인생
<평범한 인생Obyčejny život>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 1890~1938)의 1934년 작품입니다. 차페크는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지만 국내에서는 대중에게 널리 읽히는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차페크가 에세이나 희곡, 동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들을 발표한 탓에 그의 글을 사랑하는 독자들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정원 가꾸는 사람의 열두 달>,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등의 에세이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차페크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일곱 차례 이상 올랐지만 정치적인 입장을 뚜렷이 밝혔다는 이유로 수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차페크의 어떤 매력이 그를 체코 대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을까요? 카프카의 독자들은 그가 엮여가는 고유한 사유의 흐름을 사랑합니다. 카프카는 존재의 기원을 향해 돌진하며 도저히 풀리지 않을듯이 복잡하게 헝클어 놓은 사유의 흐름을 매우 아름다운 문학적 언어로 풀어 냅니다. 쿤테라 역시 존재의 의미를 들여다보지만 그것을 특유의 냉소와 무력감이라는 도구로 그려냅니다. 쿤테라가 그리는 인물들은 연극적이고 과장된 비장함으로 허우적거리며 존재와 부재, 그 사이를 방황하는 삶을 살아내지만 어느 쪽으로 돌려놓고 보아도 밋밋하지 않은 다채로운 면을 보여줍니다. 그럼 차페크가 말하는 존재의 의미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는 인간성이란 무엇일까요?
책의 줄거리
차페크의 철학적 소설 3부작 중 한 권인 <평범한 인생>은 은퇴한 철도 공무원이 자서전으로 남긴 자신의 '평범한 인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범함을 강조하며 시작하는 남자의 자서전은 수많은 가능성을 예비했던 '자신들'을 자각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자신들'은 남자에게 담겨있기도 했고, 지나가 버리기도 했고, 이미 그 자신이기도 했던 역사이자 가능성이며 그의 다른 자아이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범하고 시시한 삶인가! 어느 곳에도 모험이나 투쟁 같은 것은 없으며, 예외적이거나 비극적인 면도 없었다. ... 나의 삶은 소리도 내지 않고 멈출 것이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조용하고 묵묵히 움직임을 끝낼 것이다. 또한 그래야 한다.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열린책들, 19쪽)
남자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초입에서 자신의 삶이 단순하고 평범했다고 기술합니다. 그러나 남자의 인생을 읽어 갈수록 '평범하다'는 자인이 오히려 역설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험이나 투쟁 같은 것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예외적이거나 비극적인 면도 없었다'라고 기억되는 삶을 위해 그가 무엇을 했는지, 또는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파고들면서 '평범'의 의미는 방향을 돌려 숨겨두었던 면을 내보입니다. 그의 삶은 실제로는 여러 다양한 가능성, 경험, 그리고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며, 가능성이기만 했던 것은 현실이 된다. 나를 제한하는 이 자아가 내가 아니면 아닐수록 나는 더 많은 존재가 된다. 이 자아는 도둑이 가지고 다니는 손전등처럼 그 불빛의 반경 안에 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열린책들, 240쪽)
인간은 누구나 한번에 하나의 선택만을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선택들이 층층이 쌓인 것이 곧 나 자신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은 그저 스스로를 향한 측은함을 기반으로한 근거 없는 상상과 성급한 단정만으로 존재하기에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한 피안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능성으로 내 존재 안에 수용하게 될 때 존재라는 것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지각하게 됩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서도 풍부한 내적 세계와 다양한 인생 경로의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 외에도 살 수 있었던 다른 삶들에 대해 성찰해 보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가 복잡하고 다층적인 존재이지만 결국은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평범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평범함의 사전적 의미
남자의 사유를 제대로 따라갔다면 틀림없이 '평범'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될 것입니다. 모나거나 두드러짐이 없는 평탄한 보통의 삶... 딱 그 정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무한한 가능성과 역사를 담지한 인생이라 해도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언제나 단 하나입니다. 주체와 객체를 논하며 차 안의 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 골똘히 고민하는 당신. 놓쳐버린 선택지를 아쉬워하며 지금 여기에 도달했으나 고작 여기에 지금 멈춘 것이 아니다 변명하는 당신. 고작 이토록 평범한 인생에 도달한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길은 모든 걸음걸음은 찬란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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