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사로잡혔다.
<쇼코의 미소>는 최은영 작가의 2013년 등단작입니다. 학창 시절 즐겨 읽었던 소설은 공지영, 신경숙, 김형경 등 소위 운동권 후일담 소설이었습니다. 그들의 소설에는 주로 신경증적 증상을 보이는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소설들을 주로 읽으며 자라온 나에게 최은영의 소설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내 또래의 작가가 내 시절에 유행하던 풍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시대가 오는구나 싶은 생각에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최은영 작가는 전혀 다른, 단단하고도 다정한 길을 소복소복 걸어가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등단작인 <쇼코의 미소>는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다시 꺼내보게 되는 작품입니다.
<쇼코의 미소>는 흔하지 않은 설정인, 할아버지와 손녀의 이야기가 일본인 소녀 '쇼코'와 한국인 소녀 '소유'를 통해 병렬로 이어집니다. 누구에게나 뾰족하고 날카롭게 날이 선 면이 있습니다. 또한 그 뾰족한 면에 내가 가진 무기들을 전부 몰아넣은 탓에 한없이 무르고 연약해 숨 쉬는 것만으로도 쓰라린 면이 생깁니다. 뾰족하고 날카롭기만 한 사람, 무르고 연약하기만 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다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입니다. 뾰족한 면으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반대로 무른 면은 누군가로부터 아픈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이쪽 면으로는 가해자가, 저쪽 면으로는 피해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책의 줄거리
교환 학생으로 한국 '소유'의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쇼코'는 예쁘고 똑똑한 소녀이지만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 괴로워 빨리 집을 떠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소유'는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일생을 TV앞 쇼파에만 앉아 화만 내는 할아버지가 지긋지긋합니다. 이 두 쌍의 할아버지와 손녀가 넘어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서로를 지탱해 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큰 두 줄기입니다. 자세한 줄거리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쓰지 않겠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린아이가 소년, 소녀가 되고 단단한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노인으로 사그라들어가는 과정이 서로의 시선에서 얽히며 마음을 아프게도, 한편으로는 안도하게도 합니다.
할아버지가 우산을 조금 만지자 꼼짝도 않던 우산대가 활짝 펴졌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할아버지가 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39쪽)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같은 책, 40쪽)
나를 조금 돌려 놓아줄래?
나를 조금 돌려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두어야 합니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비굴하게 매달려서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쇼코가 본능적으로 지긋지긋한 할아버지를 벗어나지 않았듯 우리는 나를 살게해줄 사람을 찾아내어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합니다. 뾰족한 면으로 찌를 듯 덤비는 나를 보면서도 그 뒷면의 보드라운 면을 보고 하찮게 여겨줄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바들바들 떨면서 깨질 듯한 소리로 짖어대는 치와와처럼, 세상에서 제일 사나운 줄 알고 뾰족한 면으로 들이대는 나를 보고도 오히려 내 바들거리는 다리를 안쓰러워해줄 사람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나를 조금씩 조금씩 돌려놓아 달라 하면서 부디 다들 끝까지 살아주세요.
작가의 다른 책
<밝은 밤> 최은영, 문학동네, 2021년
이번에는 할머니와 손녀의 특별한 연대가 등장하는 책이다. '아직 중년도 되지 않은 어린 작가가 박완서 같은 글을 쓴다'며 주위에 몇명에게나 책을 추천해 줬다. 남자들은 '좋네...' 하는 정도의 반응이었지만, 여자들의 후기는 주로 폭풍 같은 눈물이었다. 지금도 "새비야" 하고 조그맣게 소리 내어 보면 눈물이 울컥 따라 나온다.
<딸기밭> 신경숙, 문학과지성사, 2000년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신경숙의 책이다. 최은영의 글에서 만나는 여성들과 비교해 보면 한국 문학 속의 여성 캐릭터가 그간 얼마나 성장했는지 극명하게 비교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검은 사슴> 한강, 문학동네, 2013년
그리고 신경숙과 최은영의 사이에는 한강의 <검은 사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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