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 이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1989년 <남아있는 나날>이 부커 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2005년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는 <타임>이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로도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입니다. 수상 당시 "프란츠 카프카와 제인 오스틴을 섞은 듯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근현대 영국 풍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주를 이루지만, 잔잔하면서도 섬세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묘하게 동양적인 차분함을 담고 있어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인 듯합니다.
이 책은 장기 이식용으로 사육되던 클론들의 반란을 다룬 영화 <아일랜드>와도 같은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아일랜드>가 미래의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SF라면, <나를 보내지 마>는 1990년대 후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사춘기 청소년들의 풋풋하고 섬세한 성장과 사랑을 담은 아름답기만한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복제인간, 장기기증, 예정된 죽음에 관한 담론을 제외하면, 평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청춘들의 방황과 성장의 과정이 인간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안 잖아?' 라는 질문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어떻게 바뀔까요?
책의 줄거리
책의 초반은 1990년대 후반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영국의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생활하는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시의 여리고도 섬세한 일상을 그립니다.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우정을 나누고, 관심 있는 남자아이를 두고 서로 묘한 기류를 형성하기도 하고, 무리 내에서 미묘한 주도권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관계에 미숙하고 서툴기만 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따듯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들이 전반부에서 펼쳐지지만, 점점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집니다.
"마담은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미를 겁내는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를 겁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거미가 된다면, 거미처럽 보인다면 어떤 느낌일지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보내지마,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2009년, 57쪽)
모든 아이들은 성장하기 마련이며 헤일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효용의 가치가 명확한 존재로 태어나, 그 가치가 손상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를 받으며 키워진 헤일셤의 아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헤일셤의 아이들은 인생의 여러 선택과 실패의 두려움이 없는 대신 예정된 프로그램을 잘 수행하는 것 외 다른 길이 없으며 예상할 수 있고 준비할 수 있는, 정해진 죽음을 향해 예외 없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 좀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 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란 말이다."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 거죠?...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같은 책, 357쪽)
캐시와 토미는 그 정해진 죽음을 잠시나마 보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영혼을 가진 인간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며, 그 증거가 바로 예술과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준비되지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오기 때문이고, 그 순간에 손 안에서 놓고 가야 할 것들에 대해서 미리 아까워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갖지 않은 것들, 어쩌면 죽는 순간에도 손에 쥐어지지 않을 것들조차 이미 가진 듯이 착각하고 미리 아까워합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죽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좋은 것은 모두 미뤄두고, 눈앞의 것에만 급급하며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걸까요?
<나를 보내지 마>를 주제로 작은 독서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치열했던 논쟁은 '이들은 인간인가? 아닌가?'였습니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동종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인간이다, 아니다를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기는 했나요?
나름대로 치열했던 인문학적 토론 중에 의료계있던 한 참가자께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은 태어난 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신경들이 환경에 맞게 자라나, 신체와 사유의 '인간다움'을 완성합니다. 그러므로 SF영화처럼 커다란 수조나 인공자궁에서 성인까지 생장시킨 후 적절한 시기에 '개봉'한 것은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헤일셤의 아이들처럼 신생아로 태어난 후 인간과 같은 환경, 같은 과정으로 성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사유가 가득 찬 인간입니다.
작가의 다른 책
남아있는 나날, 녹턴, 클라라와 태양 등
2023.12.13. 개봉 예정인 영화 <리빙:어떤 인생>의 각색을 맡았다고 하니, 영화를 보기 전 작가 특유의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호흡을 미리 느껴보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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