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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콘클라베>, 과도한 의심과 섣부른 확신의 코미디

by 감밀손 2025. 5. 5.

콘클라베(영화 특별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책으로, 또 영화로

<콘클라베>는 지적 스릴러의 거장으로 불리는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 1957~)의 2016년 작품입니다. 해리스는 <폼페이>, <유령작가>, 로마사 트릴로지(<임페리움>, <루스트룸>, <딕타토르>)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작가로, <콘클라베>는 그의 새로운 시도이자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강렬한 긴장감과 지적 통찰력을 겸비한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줄거리

책의 줄거리는 갑작스러운 교황의 선종으로 시작됩니다. 전 세계에서 118명의 추기경들이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에 모여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여하게 됩니다. 콘클라베의 진행을 담당하는 로멜리 추기경(영화에서는 로렌스 추기경-랄프 파인즈)의 발걸음을 따라 우리는 성스러운 자리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권력 다툼을 목격하게 됩니다.

 

해리스의 작품은 철저한 사실 조사를 바탕으로 합니다. 바티칸 공의회의 규칙부터 콘클라베를 진행하는 의식, 추기경들의 행보, 역사적 일화까지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마치 실화를 보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합니다.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의 분위기,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의 일상, 투표 과정의 세세한 묘사는 독자들을 그 현장으로 데려다 놓는 듯합니다.

 

<콘클라베>는 가톨릭이라는 특수한 배경 속에서 인간 본성의 보편적 문제를 탐구합니다. 해리스는 인간의 야망과 권력에 대한 욕망, 신념과 의심, 원칙과 타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강경 보수주의자와 자유 개혁주의자, 부를 거부하는 자와 격식을 중시하는 자, 세계화와 고립화 등 현실적인 대립의 문제를 교회라는 무대에서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뛰어난 묘사력과 탄탄한 구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 교황이 선출되는 순간, 해리스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합니다. 이 반전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바로 그 의심 덕분에 가톨릭 신앙은 계속해서 생명을 얻고, 그로써 전 세계에 영감을 줄 것입니다."

 

 

영화 콘클라베 (스포주의)

영화 <콘클라베>는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무신론자로서 점잖은 코미디 영화로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엄청난 내공의 배우들이 매우 섬세하게 연기한 탓에 가볍거나 우습게 보이지 않은, 아주 고급스러운 유머가 읽혀서 한참 여운이 남았습니다. 저와 같은 단서를 발견하신 분들이 계실까 싶어 과자 부스러기를 남겨봅니다.

 

  • 로렌스가 마침내 교황으로서의 이름을 정하고 그 뜻을 주님께 전하자마자 우렁차게 내려지는 천벌. 비스듬히 쓰러져 눈을 끔뻑이는 모습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La Nona Ora" (The Ninth Hour)와 비슷해 보입니다.

File:Guggenheim NOV2011 Cattelan 5.jpg - Wikimedia Commons

 

  • "싸움은 바깥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내 안에 있다"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는 베니테스 추기경의 감동적인 연설을 끝까지 기억하세요.
  • 천정에 가까운 높은 창에서 스며드는 햇빛과 지저귀는 새소리. 나뭇잎을 물고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를 맞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라도 된 듯 오래 갇혀 있던 추기경들은 탈출을 기대하는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결백을 확신할 수 없는 유력한 후보들을 두고 차마 '차악'을 선택할 수 없어 괴로웠던 그들이 드디어 '최선'의 답안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홀가분했을까요. 천진한 미소를 띠는 연로한 추기경들의 표정이 '이들 역시 한 치 앞을 모르는 인간일 뿐이구나' 싶습니다.
  •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무결함을 뜻함)"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짓는 로렌스. 그러나 의심을 멈춘 섣부른 확신의 순간에 짓는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 끝내 탈출하지 못하는 거북이. 언제나 탈출을 꿈꾸지만 결국 성당 안의 연못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북이는 로렌스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새로운 교황의 곁을 오래오래 지켜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