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부재의 현존과 기다림의 희극
부조리의 미학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한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는 알베르 카뮈, 에즈넹 이오네스코와 함께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극작가입니다. 베케트가 1952년 발표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최소한의 무대 장치와 등장인물, 반복되는 대사와 행동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넓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사실 베케트의 문학적 업적은 광범위합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불어와 영어로 글을 썼던 베케트는 희곡뿐만 아니라 소설, 시, 라디오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에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문체는 갈 수록 점차 간결해지고 축소되어 갔으며, 후기 작품에서는 거의 침묵에 가까운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주었습니다.
책의 줄거리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두 개의 막으로 이루어진 희곡입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부랑자가 시골길 한복판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벌이는 대화와 행동을 담고 있다. 그들은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기다림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1막과 2막은 거의 동일한 상황과 대화가 반복되며,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본질을 보여줍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파리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희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합니다.
이 희곡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디에서도 가지 않고, 정체불명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화를 나누고, 게임을 하고,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종종 순환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며, 기억도 불완전합니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극작의 요소들—명확한 플롯, 인과관계, 캐릭터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대신 반복, 순환, 정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표현했습니다. 두 막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는 구조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며, 인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행동 속에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보여줍니다.
블라디미르 너도 속으로는 반갑지? 안 그래?
에스트라공 뭐가 반가워?
블라디미르 날 다시 만나서 말이다.
에스트라공 그럴까?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해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에스트라공 뭐라고 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나는 반갑다'라고 해봐.
에스트라공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나도.
에스트라공 나도.
블라디미르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오중자 옮김, 민음사, 101쪽
결국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고도를 기다리며>는 종종 허무주의적인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끈질긴 생존 의지와 유대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함께 있기를, 함께 기다리기를 선택합니다. "가자"라고 말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희곡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모순적 본성과 함께하는 것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베케트의 이 걸작은 전후 유럽의 황폐한 정신적 풍경을 반영하면서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세계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이 비록 실패로 끝날지라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인간 정신의 가치를 묘사합니다.
현대 연극의 이정표로 여겨지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단순한 부조리극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고도의 정체, 기다림의 의미, 인간관계의 본질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7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베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그 기다림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타인과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고. 그리고 비록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가 오지 않을지라도, 기다림 자체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임을 깨닫게 합니다.